[칼럼] 테세우스의 배에 오른 현대 자본주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타고 돌아온 배는 수백 년 동안 보존되었다. 썩은 나무판자를 하나씩 떼어내고 새 판자로 갈아 끼우는 작업이 반복된 끝에, 마침내 원래의 판자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철학자들은 물었다.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배인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오래된 철학적 사고실험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우리가 타고 있는 경제 시스템의 이름은 여전히 ‘자본주의’다. 하지만 그 속을 덮고 있는 판자들을 하나씩 들춰보면, 그것이 19세기 자유방임주의 시절의 순수한 나무판자가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자본주의라는 배가 살아남은 방식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과 자유경쟁이라는 초기 자본주의의 판자는 20세기 초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풍랑 앞에 속절없이 부서졌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는 참혹한 깨달음 직후,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해 대대적인 수리에 나섰다.
이때 가져온 새로운 판자들의 출처는 역설적이게도 스펙트럼의 반대편, 즉 ‘사회주의적 아이디어’들이었다.
주 40시간 노동제와 노동법
누진세와 부의 재분배
국가 주도의 사회보장제도와 국민건강보험
초기 자유방임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요소들은 사유재산권과 시장 자율성을 침해하는 '불순한 판자'들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살아남기 위해 이 판자들을 대어 배를 보수했다. 정체성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대신, 반대편 이념의 유용한 부품을 수용함으로써 침몰을 면한 것이다.
'100% 교체'인가, '결정적 보수'인가
물론 엄밀한 철학적 잣대를 대는 이들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부품이 100% 교체된 극단적 상황을 전제로 하므로, 여전히 사유재산권과 이윤 추구라는 핵심 엔진이 작동하는 현대 자본주의를 테세우스의 배에 비유하는 것은 과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핵심은 '완전한 대체'라는 결과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혼종화(Hybridization)'라는 역사적 기전에 있다.
아무리 신자유주의와 시장 가치를 부르짖는 국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노동법을 전면 폐지하고 건강보험을 완전히 해체하여 19세기의 순수 자본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 시도는 순식간에 사회적 대폭동과 체제 붕괴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배가 바다 위에 계속 떠 있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 판자들은 이미 사회주의적 유산으로 채워져 있으며, 이는 되돌릴 수 없는 불변의 구조가 되었다.
이름과 내용물의 아슬아슬한 거리를 직시하기
우리는 여전히 이 배에 ‘자본주의’라는 표지판을 붙여두고 항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잔 안에는 이미 복지, 규제, 국가 개입이라는 우유가 듬뿍 섞여 ‘카페라떼’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변질이라고 부르든, 혹은 위대한 생존의 진화라고 부르든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더 이상 특정 이념의 순수성에 갇힌 굳건한 단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라는 반대편의 판자를 끊임없이 덧대며 유지되는, 가장 거대하고 완고한 '테세우스의 배'다. 우리가 이 명칭과 속재료 사이의 아슬아슬한 격차를 직시할 때 비로소, 이념의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고 현실의 경제 체제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